삶의 기초로서의 기독교 세계관
- 김성현
- 2018년 8월 20일
- 18분 분량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제 이름은 김성현입니다. 건국대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여러분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 이 주제는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올해 컨퍼런스의 주제는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 주제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기독교 세계관은 이 주제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세미나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이며 왜 우리 삶의 기초가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한번쯤 세계관이란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세계관을 직역하면 세계를 보는 눈, 관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치 안경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안경을 썼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빨간 안경을 끼면 온통 빨갛게 보일 것이고 파란 안경을 끼면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일 것입니다. 안경이 매끈하지 않으면 세상은 뒤틀려 보일 것입니다. 많은 안경이 있는 것처럼 세계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경과는 달리 세계관은 우리의 생활방식과 삶의 목표를 결정합니다. 세계관에 대해선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고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엔 여러 세계관을 소개하는 대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세계관은 성경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성경적 세계관이라고도 합니다.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에 답을 줍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디에서 왔나 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모든 사람이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단지 물질로부터 유래한 자연적 과정의 산물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둘째, 나는 왜 사는가. 이 질문은 삶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는 장성하면서 자의식이 생기고 그런 질문을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삶의 목적을 찾아 방황합니다. 셋째,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인가 아니면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넷째, 왜 고난은 존재하는가? 모든 곳에서 항상 고난을 봅니다. 고난이 정상이 아니고 삶의 비정상이라는 걸 깨달을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우리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어떻게 고난이 삶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세계관이 다르면 답도 다릅니다. 이 질문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더 깊은 질문을 합니다. 과연 궁극적인 존재가 있는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는 선하실까 악하실까 아니면 상관이 없을까. 우리는 어떻게 선악을 알 수 있는가?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어느 세계관을 가졌냐에 따라 우리의 답이 다르며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성, 인종, 사회적 지위나 교육의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할머니라 할지라도 세계관이 있습니다. 단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의 세계간은 대부분 감춰져 있습니다만 특별한 상황이 되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 낙태, 안락사, 이혼, 페미니즘 등과 같은 이슈가 제기되면 그 사람의 세계관이 드러납니다. 최근 이 나라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엔 두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성애가 뭐가 문제냐? 개인적인 문제이니 허용하자. 금지한다는 것은 인권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성애는 자연적인 경향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이즈의 원인이 되며 자신의 삶과 가족, 사회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금지해야 한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겁니까? 이러한 의견을 자세히 조사하면 이면에 다른 세계관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세계관이 다른 의견과 자세를 만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의 생각, 행동 나아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제임스 사이어의 책 이웃하는 우주는 세계관에 대한 입문서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등과 같은 다른 세계관과 비교합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남자가 우주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선생님, 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들려온 소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사실이 내게 아무 의무감을 일으키지 않네.” 그 사람은 아마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광활한 우주에 대해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얻은 답은 공허한 메아리 뿐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3000년 전 목동이었던 한 소년은 동일한 우주를 보면서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시는 시편 8편으로 다윗의 시입니다. 그는 시편 19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우리는 방금 동일한 우주를 보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경우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비록 광대하고 아름답고 측량 못할 우주를 보았지만 그의 영혼의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완전히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와 정교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세계관을 갖기 원하십니까?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에서 유래하였기에 성경적 세계관으로도 불립니다. 이 용어는 네덜란드의 신학자, 정치가, 언론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처음 사용하였고 후에 역시 네덜란드의 철학자인 헤르만 도예베르트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삶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본 강의 뒷부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주제는 창조, 타락, 구속입니다. 이런 구분법으로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삶과 삶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사고의 확고한 기초를 세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리 구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7C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창조, 타락, 격변, 혼잡, 그리스도, 십자가, 완성의 머리글자 C를 따서 구별하기도 합니다. 또는 회복을 첨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구분법인 창조, 타락, 구속에 기초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창세기는 성경의 첫번째 책으로서 성경 66권중 가장 중요합니다. 창세기는 다른 성경의 기초가 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면 전 성경이 부정되거나 왜곡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역사성과 실재성을 받아들일 때만이 성경의 다른 부분도 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창세기는 그 이름이 가리키듯 많은 중요한 것의 기원을 보여줍니다. 창세기는 우주, 태양계, 생명, 결혼, 죄, 가정, 일, 사회, 언어, 선민 등의 기원과 참 의미를 말해 줍니다. 예를 들어 일부일처제를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그런 제도가 시작되었습니까? 어떤 문화인류학자가 주장하듯 일부다처제에서 유래하여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일처제로 바뀐 것입니까? 어떻게 결혼제도가 시작되었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선 창세기를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명확히 그 시작과 의미를 일러줍니다. 창세기 2:24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구절은 명확히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근거하여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고 법, 결혼, 삶의 표준, 삶의 의미 등을 세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가 부정되면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구조물들은 붕괴될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세계관의 첫 번째 주제인 창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는 어떠한 애매모호함도 없이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간단한 문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잘못된 신념체계를 배격합니다. 첫째, 이 구절은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구절은 범신론을 배격합니다. 범신론은 만물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내재하는 신의 일부라는 견해입니다. 즉 실제 존재하는 모든 형태는 어느 정도의 신성을 소유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산이나 나무를 숭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신령한 영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만물에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 밖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창조주는 피조물과는 명확히 구별됩니다. 셋째, 이 구절은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는 다신론을 배격합니다. 신명기 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온갖 잡신 같으신 분이 아닙니다. 넷째, 이 구절은 이신론을 배격합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을 마치 시계공처럼 보는 견해입니다. 시계공은 매우 정교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시계를 만듭니다. 그러나 일단 시계가 만들어지면 시계는 더 이상 시계공과 상관이 없습니다. 시계공은 그가 만든 시계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계는 자신의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합니다. 이신론자들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봅니다. 그들은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그 안에 우주가 운행되는 법칙들을 심어 놓았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탄했고 우주를 설명하는 궁극적인 이론을 찾아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방관자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지금 이 시간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분입니다. 다섯째, 이 구절은 물질주의를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창조된’ 것이며 그 자체로 궁극적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물질 혹은 돈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요즘 만연해 있습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젊든 나이 들었든, 교육을 받았든 못 받았든, 남자건 여자건 할 것없이 많은 사람들이 돈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사는데 필요합니다. 성경은 물질을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물질주의는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 맘몬, 즉 재물을 섬기게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섯째, 이 구절은 진화론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지 혼돈상태에서 진화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무로부터 완전한 상태로의 순간적인 창조입니다. 성경적 창조론은 많은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창조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각종 창조신화는 창세기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화는 이 세상은 무로부터가 아닌, 무언가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매우 슬프게도 우리는 학교에서 오직 진화론만 배웠습니다. 우리는 생명은 물질로부터 유래했고 최초의 아메바와 같은 원시생명체가 진화하여 심지어 인간과 같은 고등유기체로 진화했다고 배웠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과는 날카롭게 대비됩니다. 진화와 창조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떠한 진화의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1:1은 ‘인본주의’를 배격합니다. 인본주의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견해이지만 그것을 훨씬 벗어납니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궁극적 존재이며 다른 것들을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인본주의는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사회문제는 사회제도나 법을 제정함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본성까지도 교육이나 환경을 바꿈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증거하듯 그런 모든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창조의 클라이맥스는 인간의 창조입니다. 모든 것을 보시기에 매우 좋게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문화명령’이라고 부르는 할 일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당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임무는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탐구하고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청지기는 집의 주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도 아닙니다. 그는 주인을 대신하여 집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미리암-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청지기는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청지기란 하인의 감독, 임대료 징수, 회계 등과 같은 내부의 일을 관리하기 위해 큰 집이나 사유지에 고용된 사람이다. 이러한 임무를 청지기직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삶과 일터에서 청지기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와 같이 자연과학분야에서 연구하는 사람은 자연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를 탐구하고 그것을 인류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예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예술에도 질서를 부여하셨다고 확신합니다.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비즈니스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법칙과 원리를 제정하시고 심어 놓으셨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1:28절을 달리 해석합니다. ‘다스리라’라는 단어로 인해 환경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 명령에 의해 사람들은 환경을 파괴할 권리를 얻었고 그 결과로서 생태적 위기가 초래되었다. 기독교가 이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그것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한데서 온 그릇된 주장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자연의 남용이나 착취를 정당화하는 단 한 구절도 찾을 수 없습니다. 문화명령은 하나님이 선물로서 주신 자원을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활용하라는 명령입니다. 현재의 환경오염과 생태학적 위기는 기독교가 아니라 인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청지기직을 신실하게 수행하지 못해 지구는 오염과 무분별한 착취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이나 들어갈 때마다 사회는 변혁되고 삶의 질은 나아졌습니다. 배움과 비즈니스가 장려되었고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인권, 특히 여성의 인권이 회복되었습니다. 한국이 좋은 예입니다. 약 130년 전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분사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로 인해 한국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했습니다.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의 두 번째 주제인 타락에 대해 살펴봅시다. 매우 슬프게도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죽음이 모든 만물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타락의 영향은 아담과 이브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이브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였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저주받아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제 자연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평생을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브에게는 아이 낳는 고통이 크게 더해졌습니다. 노동은 원래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서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힘든 일이 된 것입니다. 타락의 영향은 훨씬 더 확장되었습니다. 모든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가렸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유롭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간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갈등, 심지어 부부간에도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습니까? 죄를 짓자마자 아담은 자기에게 열매를 주었다고 이브를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이브를 자신의 아내로 준 하나님마저 비난했습니다. 창세기 3:12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얼마나 비겁합니까. 이브는 뱀을 비난합니다.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로운 관계도 깨졌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연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자연재해가 있는지 보십시오. 자연은 더 이상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는 어느 지역에는 홍수가, 다른 지역에는 가뭄이 들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공전의 더운 여름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올해 여름은 예외적으로 더웠습니다. 그 원인은 타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우리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 천 년의 인류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사람은 구속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깨어진 관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회복됩니다. 우리 죄의 화목제물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기독교세계관의 마지막 주제인 구속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타락 직후 하나님은 장차 다가올 구속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은 원시복음이라고도 불립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장차 오실 구세주에 관한 예언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에베소서 2:14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완전한 회복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성취될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렵고 고난으로 가득 차 있어도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구속의 희망을 가지고 살며 매순간 예수님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어떤 삶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삶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용어가 말해주듯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주시라면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이십니다. 이것을 주되심이라 합니다.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분야에서 마땅히 예수가 주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업가는 자신의 사업의 세계에서, 정치가는 정치에서 예술가는 예술에서 언론인은 언론계에서 예수님이 주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이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유에 대해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제 성구인 로마서 11:36은 말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또한 골로새서 1:16, 17에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적 영역뿐 아니라 비가시적 영역에서도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닌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누가 여러분 삶의 주인이십니까? 혹시 어떤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입니까?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은 단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했으면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수 많은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이 이 세계관을 지니고 살면서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곧 순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하고 있는 이 나라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누구가 무엇을 믿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습니다. 제가 예상하기로 언젠가 예수를 우리의 주요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 불법일 때가 올 것입니다. 아무도 노골적으로 예수 믿는 것을 막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를 한번 자세히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한국사회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교회는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한번 둘러보아도 3~5개의 교회를 발견할 것입니다. 정확히 교회의 숫자에 반비례하여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많은 실수와 잘못을 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가르치기를 세상이 우리가 단지 세상이 아닌 예수에게 속했다는 사실 때문에 점점 더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18,19은 말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왜 우리를 미워한다고요? 우리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핫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정부는 인권이란 이름 아래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을 허용하는 쪽으로 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젠더란 사회적 성을 의미합니다. 여기엔 남성, 여성 뿐 아니라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소아성애, 수간, 시간 등등이 포함됩니다. 우리 정부는 그런 식으로 성을 정의하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법안이 통과되면 동성애, 동성결혼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뒤틀린 성적 행위까지 허용될 것입니다. 실제론 훨씬 그것 이상입니다. 학교는 동성애, 동성결혼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결혼도 가르쳐야 하며 심지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법을 위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처벌받습니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여러 주에서 동성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허용할 뿐 아니라 동성애가 잘못이라고 말하면 법의 이름으로 처벌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동성애를 허용하도록 법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을 처벌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매우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모두 명백히 동성애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현행법과 정면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게 불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합법적으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이미 몇몇 유럽 국가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나라가 그런 법을 제정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전히 예수를 고백하며 기꺼이 박해를 감수하시겠습니까?
남은 시간 기독교적, 성경적 세계관으로 살았던 몇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성경인물인 다니엘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국제적 대 혼란의 시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왕족 혹은 귀족 가문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었고 교육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니엘은 성경적 세계관을 배웠고 그에 따라 그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전 60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해 왔을 때 그는 잡혀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끌려갔고 성전의 제기들도 탈취되어 바벨론의 이방신전에 놓였습니다. 다니엘은 아마도 자신의 눈 앞에서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그를 당혹스럽게 했으며 혼란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와 슬픔을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 간의 전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인이 섬기던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던 가짜 신 마르둑에게 패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다니엘은 영적 위기를 겪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아마도 끌려갔을 때 순교를 각오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실제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잘 대접받았습니다. 그는 선발되어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이름은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로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언어와 학문을 배우도록 강요되었습니다. 그에겐 왕의 식탁에서 나온 음식과 포도주가 제공되었습니다. 그가 예상했던 고난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1:3-5을 읽어 봅시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바벨론의 정책은 그들이 정복한 나라에서 똑똑한 젊은이를 취해 바벨론화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이것은 매우 현명한 정책이었습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다니엘이 겪었던 영적 위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름과 언어는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뀌고 바벨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다니엘에겐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위기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심판자이다”라는 뜻이지만 벨드사살은 “벨의 왕자”란 뜻입니다. 벨은 바벨론 여러 신들 중 하나의 이름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언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너는 이제 바벨론 사람이지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흔들렸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비슷한 정체성 위기를 겪었습니다. 35년 간의 일본의 지배하에 있을 때 저의 조부모와 부모님들은 이름을 바꿔야 했고 일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저의 성은 김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네무라라는 새로운 성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혹시 일본학생 여기 있습니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지 역사적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학문을 배웠다는 것은 이교도적, 세속적 세계관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게 주입되었다는 뜻입니다. 왕의 진미는 육체적 만족을 뜻합니다. 왕의 포도주는 세상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만 포기하고 바벨론이 제공하는 것을 받기만 했다면 세속적 쾌락과 성공은 보장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잡혀온 다른 젊은이들은 이러한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러한 정체성 위기의 상황에서 다니엘은 무엇을 했습니까? 현실을 무시하고 반역을 꾀했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했나요?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에서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거절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니엘은 바벨론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다니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신실했고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메대, 바사 세 왕국에서 최고의 관리로서 그의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다니엘의 이런 영적인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무엇보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그런 행위가 목숨까지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결코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습관적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 여전히 어두울 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둘째, 다니엘의 영적 능력은 그가 신실한 친구를 가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시기 서로 격려하고 의지했습니다. 삶을 서로 나눴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삶을 나눌 친구를 갖기를 강하게 권면합니다. 다니엘은 왕을 비롯하여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비록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고국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게끔 바사왕 고레스를 움직인 사람이 다니엘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니엘의 지혜, 신실함, 업무에 있어서 탁월함, 그리고 말과 행동의 일치 등이 고레스 왕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입니다. 후에 바사의 다른 왕들도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는데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다닐엘의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공부하러 외국에서 왔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를 떠날 때 아마도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 여러분의 영역에서 유명해진다든지 정부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든지 아니면 회사를 경영하여 큰 돈을 벌겠다는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꿈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제어된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분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세상적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다니엘처럼 여러분의 분야를 마스터하여 능력 있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여러분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들의 믿음을 지키십시오. 이 혼란한 시대에 우리의 기독교신앙에 반하는 그 무엇에 대항하여 굳게 서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무엇과도 타협하지 마십시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을지라도 그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세 친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고 풀무불에 던져졌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기독교 믿음으로 살았던 몇 명의 인물을 소개할까 합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제가 존경하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습니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의 시기를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실했던 그는 우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높아지는 대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길 원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이삭 뉴튼이 저 유명한 만유인력법칙과 미적분학을 발견하기 전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항성의 운동을 지배하는 세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 법칙들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의 불완전성을 보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화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용병으로서 집에 별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녀로 몰려 마녀사냥 당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의 첫째, 둘째 아이는 어렸을 때 죽었고 나머지 세 아이는 천연두로 고생하다가 네번째 아이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자신이 나머지 두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재혼했습니다. 그의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은 죽었고 두번째 부인에게서 난 두 딸 역시 죽었습니다. 단지 한 아이만 살아남아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녀로 몰린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그의 어머니는 곧 죽었습니다. 당시는 유럽이 개신교와 카톨릭 국가간 30년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입니다. 케플러는 개신교도였습니다. 영주에 의해 카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카톨릭으로 개종만 하면 많은 수입과 안락한 삶이 보장되었지만 케플러는 기독교신앙을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지만 케플러는 정당한 임금을 못 받아 항상 가난에 찌들렸습니다. 밀린 임금을 받으러 길을 떠났다 노중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삶은 한 사람이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신비를 드러내길 원했습니다. 그는 천문학만큼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몇 편의 신학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케플러의 연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그의 이름을 천문학을 통해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주에 법칙들을 심어 놓으셨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20년을 연구하게 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케플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질 수 있다면 저의 이름은 사라지게 하소서.”
다음으로 살펴볼 인물은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았던 아브라함 카이퍼입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목사, 언론인, 정치가, 신학자, 교수, 그리고 개혁가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네덜란드는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로 물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네덜란드를 개혁하기 원했습니다. 인본주의적, 무신론인 국립대학교에 반대하여 그는 암스테르담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자유대학을 세웠습니다. 많은 유력한 인물들이 이 대학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그는 스탠다드라고 하는 신문도 발행하고 오랫동안 편집인으로 일했습니다. 정계에도 진출하여 반혁명당이라고 하는 정당을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을 거쳐 마침내 수상이 되어 네덜란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는 1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을 그는 영역주권론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가시적, 비가시적 영역을 창조하셨고 각 영역에 고유한 규칙과 질서를 세워 놓으셨다. 국가, 교회, 학교, 가정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규칙과 질서가 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술, 문화, 법, 자연과학, 문학에도 규칙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용하여서 이러한 영역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회복시키시길 원하신다.
카이퍼는 이 세상을 성과 속으로 분리하는 이중적 생각을 반성경적인 것으로 반대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도록 거룩한 열정을 지닌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보다 어 열정적이고 더욱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잠시 쉬면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학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면에서 여러분의 전공분야가 인본주의나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자신의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화학, 그것도 분석화학을 가르칩니다. 제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배웠을 때 어떻게 그것을 저의 전문분야에 적용할까 생각해 왔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 강사들은 주로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성경은 경제나 정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학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화학이 나오나요? 아마 나올지도 아닐지도요. 강의 후 강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좋아요, 강의가 매우 좋았습니다. 강사님의 설명에 동의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저의 전공분야인 화학에 어떻게 적용할지 도와주시겠습니까?” 적어도 두명의 강사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습니다. 전 동일한 답을 받았습니다. 즉, 그것은 화학은 당신 전문분야이니 화학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세우는 것은 당신 책임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답을 들을 줄 예상했습니다. 성경이 화학에 대해 더구나 분석화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강사들이 구체적인 답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화학교수로 23년간의 경험을 통해 저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은 화학뿐 아니라 어떠한 주제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저의 분야의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분야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단지 프로젝트를 하나 끝낸 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연구에 적용한다는 것은 연구의 전 과정, 연구주제를 정하고 연구그룹을 이끌고 데이터를 해석하는 전 과정을 포괄합니다. 대부분의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는 자연계에 숨겨진 질서를 찾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서 비록 그런 용어는 쓰지 않지만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연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에 관계된 연구가 그런 종류입니다. 인간배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나라의 현행법은 수정된지 14일이 지나지 않았으면 인간배아에 대한 실험을 허용합니다. 14일째부터는 의학적으로 인간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법으로 인간배아 실험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학적 결정에 동의하십니까? 일단 수정되면 배아는 인간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9개월이 지나면 아기로 발달하게 되어 있는 시간문제에 불과합니다. 다른 예는 낙태입니다. 낙태를 허용해야 할까요 금지해야 할까요? 불가피하게 낙태해야 할 경우가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전 특별한 이유없이 하는 일반적인 낙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낙태는 불법입니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해마다 약 50만건의 낙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또한 연구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같은 연구를 할지라도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일차적 의도가 연구를 통해 돈을 버는 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 자체는 문제없습니다만 그것이 여러분의 목적이라면 기독교적 세계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들은 빌 게이츠처럼 부자가 될 수 있고 도날드 트럼프처럼 권력을 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선 안됩니다. 여러분이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연구를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자료의 해석도 중요합니다. 비록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할지라도 세계관에 다라 해석이 매우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화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면 그 세계관에 맞게 결과를 해석할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면 해석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인문학이나 사회학에서 중요합니다. 혹시 그런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면 기독교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능력을 배양하시길 권고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명을 소개함으로 저의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위대한 학자인 임어당입니다. 가난한 목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기독교적 교육을 받았고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워 영어를 아주 잘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하바드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중국으로 돌아와 북경대학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고 영어로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의 책들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록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진리를 찾아 기독교신앙을 떠났습니다. 그는 수 많은 철학서적과 동서양의 문헌들을 읽었습니다. 그의 베스트셀러인 생활의 발견에서 그는 이교도라고 자신을 천명하고 왜 이교도가 되었는지 설명했습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은 후 기독교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20년 뒤 그의 거의 마지막 책인 “이교도에서 기독교도로”란 책에서 그는 어떻게 긴 사상적 방황을 끝에 기독교로 돌아왔는지 설명합니다. 그 책에서 그는 수많은 철학자와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평가합니다. 얼마나 그가 공부를 많이 했는지 놀라실 겁니다. 그는 그런 사상들 속에서 지적인 희열을 맛보기도 했고 잠시 그 안에 머물기도 했지만 결코 만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유교의 인본주의라는 맨션에 잠시동안 살았다. 도교의 산봉우리에 올라 장엄함을 관찰했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사상들은 단지 촛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촛불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촛불을 끄라. 태양이 떠올랐다.” 태양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 앞에선 모든 인간의 사상은 빛을 잃습니다. 임어당은 한 순간에 기독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 도달하기 위해 커다란 우회로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 보다 기독교의 우월성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강의를 맺겠습니다. 매우 간단히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엇이고 우리의 삶에 왜 중요한지 알아보았습니다. 이 세계관을 따라 산 사람들의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인 CS 루이스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지 태양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고 태양을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여러 사상 중 단지 하나의 사상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성경적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우리 활동의 전 영역을 포괄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기초이며 우리 정체성에 관해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떠나선 이 세계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여러분의 삶과 전문분야에 적용하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 주제 성구를 같이 일고 마치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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