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과학적 이해
- 김성현
- 2016년 2월 24일
- 7분 분량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잘 못된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성경은 비과학적인 사실과 오류로 가득찬 종교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무신론자나 회의론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반면에 기독교인 중에서는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과 신자들의 삶에 대해 기술한 영적인 책이므로 과학적, 역사적인 언급이 있을 때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성경이 객관적인 어떤 사실에 대해 기술할 때, 단지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고 가정해 버린다면 결국 성경을 오류가 가득찬 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은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터이지만 많은 경우 과학적인 내용에 대해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런데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요한계시록조차 그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계 1:3)고 하셨다. 계시록의 말씀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성경 말씀들이야. 그것들이 오직 영적, 비유적으로 쓰여져 있다면 일반인들이 어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따라서 말씀을 받아들일 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성경은 그 말씀 그대로를 의미한다는 문자적(literal)인 해석방법을 취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의 내용이 놀랍도록 사실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성경에 대해 과학적인 증거를 찾는 일이 필요한가? 첫째,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믿음이 사실에 기초할 때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확고해지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성경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임을 확인할 때 믿음이 굳건해진다. 둘째, 복음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 믿고 싶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아서 성경을 믿지 못하거나 예수를 영접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성경의 완벽한 구조, 예언의 성취등과 더불어 성경의 과학적인 면도 보여준다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말씀의 무오성과 완전성에 대해 상황에 관계없이 확신을 주며 과학이란 이름의 여러 도전에 대처할 수 있다. 정보의 사회, 지식의 사회인 지금 과학이란 이름으로 성경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에 대해 정면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성경이야 말로 증명된 것이며 과학적으로도 사실임을 보여줌으로써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으며 말씀을 방어할 수 있다. 체험을 나타내는 간증도 중요하지만 사실에 기초한 변증도 중요하다. 베드로는 말하길,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이라고 하였고 바울도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1:7)’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답’과 ‘변명’은 헬라어 apologia로서 변증학을 뜻하는 apologetics가 파생되었다. 예수님도 증거에 대해 무심치 않으셨던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행 1:3). 많은 과학적인 내용들 중 몇가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정확무오함을 알아보자.
1) 창세기와 과학
비록 수식이나 테이블은 없더라도 성경은 많은 과학적 원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원리들은 인간의 과학지식이 발달하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로 주어진 것인데 오늘날 그 타당성이 명백히 입증되고 있다. 과학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조건 내에서 물질(등가적으로 에너지)의 변화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1은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태초(시간)에 하나님이 천(공간) 지(물질-에너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하다에 쓰인 히브리 단어는 bara인데 이것은 아주 독특한 단어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에만 쓰인 단어이다. 존재하는 물질로 부터 만들 때는 asah란 단어를 쓴다. bara는 인간을 창조할 때도 쓰였다. 이 두 단어가 같이 쓰인 예가 창세기 2:3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렇게 첫째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심으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세가지 구성요소(시간-공간-물질)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시기, 즉 물질을 energize시키시기 전까지는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캄캄하였다.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빛이 있으라’였다. 명백히 이 빛은 햇빛은 아니다. 해는 네째날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기사로 보아 이때 이미 지구의 자전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날에 또한 현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4가지 근본적인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생겨났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 4가지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정확히 기술할 수는 있지만 왜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지는 논의 밖이다. 누군가(하나님)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힘에 대한 암시를 찾아볼 수 있다. 중력에 대한 예가 욥기 26:7에 나와 있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성경의 진술은 현대 과학과 모순되는 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암흑기 때문에 과학의 발달이 늦어진 사실을 성경의 오류에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카톨릭 성직자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에 있지 성경의 오류는 결코 아니다. 둘째날 하나님께서는 물을 둘로 나누었다. 지금은 궁창위의 물은 없지만 최초 창조된 상태에서는 지금의 대기권 밖에 water canopy라 불리는 두꺼운 물층이 있어 외부로 부터의 유해한 자외선이나 우주선을 차단시켜 주고 지구에 온실효과를 나타내어 아열대성 기후를 유지하게 해 식물이 잘 자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궁창 위의 물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노아의 홍수 때 내려와 온 지구를 뒤 덮었다. 셋째날에는 지구의 뭍을 드러내시고 식물을 창조하셨다. 이렇게 셋째날까지의 과정은 다음 3일 동안의 창조사역을 위한 준비단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넷째날은 첫째날 창조한 우주공간에 해, 달, 별을 만드셨다. 이제 해가 지구에 빛을 비추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또한 징조, 사시, 일자, 연한을 이루라는 말씀에서 지구의 축이 기울어지고 해 주위로 공전하기 시작했음도 알 수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지구와 해의 창조순서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지구는 해의 파편이 식어서 된 것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이와 정반대이다. 지구가 먼저 창조되었다. 이 사실로 부터도 지구의 독특성과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외계 행성에의 생명체 탐사 프로젝터인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지 거대한 돈의 낭비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적 창조론을 받아들일 수 없음이 명백하다. 다섯째날에는 궁창에는 새들, 물에는 수중 생물들을 만드셨다. 큰 물고기(sea monsters)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고래를 뜻하는지 아니면 다른 생물을 뜻하는지 확실치 않다. 우리는 아직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알지는 못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생물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공룡이 그렇고 욥기에 나오는 Behemoth와 Leviathan(욥 40, 41)가 있다. 여섯째날 하나님께서는 육지의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비록 흙으로 부터 만들어졌지만 (1:26, asah)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1:27, bara)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경의 창조기사는 몇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째, 그것은 유일신에 의한 초자연적인 창조이었다. 이 세상에 창조설화는 많지만 성경처럼 무에서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들째, 순간적인 창조이다. 진화론자들은 수백억년의 진화의 과정을 말하고 이것을 성경과 조화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은 창조의 수단으로서의 진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을 유신론적 진화론 (theistic evolution)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창세기 기사를 읽어보면 어디서도 진화에 대한 실마리나 긴 시간에 대한 추측을 찾아볼 수 없다. 6일 창조의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날’은 히브리어 Yom인데 대부분의 경우 24시간을 뜻한다. 셋째, 명백한 목적이 있는 창조이다. 진화론에서는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시간+우연의 산물이라면 어찌 그 가운데에 목적이 있을 수 있겠으며 인생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 명백한 목적이 있었으며 인생들에게 할 일을 주셨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8:1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했고 19:1에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했다. 성경 여러 군데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말하고 있다. 대상 16:29에 ‘여호화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했고 시29:1,2에서는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했다. 진정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고전10:31).
2) 열역학 법칙과 성경
이 세상에는 수 많은 법칙들이 있어 각각 특수한 상황, 조건에서 적용되어지지만 상황에 관계 없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성립한 법칙이 있는데 열역학 제 1법칙과 제 2법칙이 그것이다. 놀랍게도 이 내용들이 성경에 나오고 있다. 열역학 제 1법칙이 말하는 바는 에너지는 보존된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는 창조되지도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이 법칙이 성립하였고 그 뒤로는 이 법칙 내에서의 물질의 변화와 에너지의 이동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없는 한 이 법칙은 지금까지 성립되어 오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의 무에서의 창조는 없음이 성경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전3:15)’,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열역학 제 2법칙에선 우주 전체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되 (제 1법칙)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점점 줄어든다고 말한다. 즉 자발적인 과정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한다. 이 법칙은 그야말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무언가 우리에게 쓸모 있는 일을 하려면 우리의 땀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저절로 음식이 생기지 않는다. 밭에 경작하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추수하여야 한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써 자연은 이제 더 이상 favorable하지 아니하였다.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겨우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 우리만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만물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바 유토피아는 한낱 헛된 망상이다.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열역학 제 2법칙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 바울도 증거하기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롬5:1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2).’
3) 성경중의 몇 가지 대표적 과학적 언급
(1) 유전법칙
창세기 1장의 ‘종류대로’란 말씀에서 생명체는 원래부터 그 종류가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기사가 창세기 30:37-43에 나온다. 야곱이 라반에게서 자기 소유를 늘이는 과정인데 양이나 염소중에서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기 위해 야곱은 나무 껍질을 벗기고 흰 양이나 흰 염소들이 새끼를 밸 때 즉 교미할 때 보여주었다. 이것은 출산 전 어미가 본 것을 낳는다는 고대 풍습에 따른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희망대로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이 태어나게 하셨다. 그런데 유전학적으로 보아도 이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흰양에게도 점이나 얼룩진 양을 낳게 하는 유전자가 잠재되어 있을 수 있다. 야곱이 이것을 알았을리는 만무하지만 유전법칙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야곱이 원하는 그 때에 그런 양이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밖에 없다. 고전 15:39의 말씀으로 부터도 이 세상 생물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요 원래부터 각각 다른 종류로 생겼음을 알 수 있다.
(2) 만유인력
지금 우리는 천체들은 어디에 매달려 있지 않아도 서로의 인력에 의해 지지되고 있음을 안다. 욥 26:7와 38:6은 바로 그러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그 주초는 무엇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욥을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기또는 이전의 사람이라고 할 때 이 서술은 인간의 과학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때까지 이것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3) 묘성과 삼성
욥 38:31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실제 육안으론 하나처럼 보이는 묘성은 수많은 별의 집단이다. 묘성이 많은 별의 집단이라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망원경의 발달로 확인이 되었다. 또한 여러 별의 집단처럼 보이는 삼성은 실제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욥이 과학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우주의 크기, 둥근 지구, 대기의 순환, 별의 수 등에 관해 성경은 놀랍도록 과학적인 내용들을 말하고 있다. 물론 명확히 과학적인 용어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믿음의 눈과 과학적인 지식으로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성경의 과학적인 면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성경이 물론 과학책은 아니지만 우리의 각 분야에서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대할 때 귀중한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Matthew Maury는 해양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가 해류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미 해군연구소에 근무할 때 시편 8장을 읽던 중 8절의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의 말씀으로 부터 실제로 바다에도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해류를 찾아 나섰고 찾기에 이르렀다. 그의 묘비에는 시8:8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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